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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nocence

비운의 물리학자 이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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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물리학자 이휘소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지 벌써 30여년이 지났다.

400만부가 팔려나간 김진명씨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도 등장하였고, 그 모토가 되었던 89년 공석하씨의 <핵물리학자 이휘소>에서 그의 전기를 다루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휘소박사는 이런 소설속에서 재창조되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가 핵무기를 만들려고 했던 것도, 그가 미국 정보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의혹도 소설적 요소에 의해 과정된 사실로 봐야할 것이다.

실제로 이휘소 박사의 가족들은 이휘소 박사를 소재로 한 소설에 대해서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작가와 출판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내기도 했다.


우선 그와 핵무기와의 관련성이다.


이휘소 박사는 우주를 구성하는 원리와 입자를 밝히고자 하는 물리학의 본연의 정신에 입각하여 연구에 매진했다.

물리학은 가장 폭넓게 우주의 삼라만상을 다루고 있다. 태초에 우주가 생성돼 지금까지 진화해온 과정과 물질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알려는 것이다. 물리학도의 궁극적 목표는 통일된 원리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인데 이휘소 박사는 이 방면에서 선구적 대열에 있었던 역사적 이론 물리학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기본 입자들은 각각 6종류의 쿼크와 경압자 그리고 게이지 입자들이다. 이들이 결합하여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우주의 모든 물질이 구성되는 것으로 물리학자들은 믿고 있다.


현재 알려져 잇는 힘은 네가지 종류가 있다. 물체를 땅에 떨어지게 하거나 지구를 태양 주위에 돌게 하는 힘은 중력으로, 흔히 만유인력이라고도 한다. 전기나 자성을 가진 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니ㅏ 빛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전자기력이다. 한편 원자핵이 형성되도록 핵자간에 작용하는 강한 힘을 핵력이라고 하고, 원자핵의 베타 붕괴에서 볼 수 있는 약작용력이 있다.

코프레니쿠스의 천동설을 근거로 하늘의 천체운동에 관한 케플러 법칙과 땅 위에서의 물체 운동에 대한 갈릴레오의 운동법칙을 통일한 것은 뉴튼의 만유인력이다. 19세기 중반에 맥스웰은 전기자기 광학적 현상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전자기 이론을 만들어내 현대 전기 문명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장 이론으로 설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힘의 통일은 67년 와인버그, 살람, 글라쇼가 네가지 힘 가운데 전자기력과 약작용력 두가지 힘을 먼저 통함함으로써 큰 틀을 마련했다. 이는 게이지이론의 자발적 대칭 파괴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험적으로 타당한 이론이 되기에는 재규격화라는 큰 난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 난제는 70년대 초 이휘소 박사가 쓴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라는 논문으로 인해 큰 발전을 얻는다. 이휘소 박사는 게이지 이론을 정연한 수학적 논리로 증명함으로써 이 방면에서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의 큰 기여를 하였다.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이 분야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에따라 게이지 이론을 제창한 와인버그 등 3명은 7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휘소 박사의 다른 큰 업적은 매혹 쿼크로 구성된 새로운 소립자의 이론적 예측이었다. 당시에는 위, 아래, 기묘 등 3가지 종류의 쿼크만 알려져 있었는데, 어떤 소립자가 아주 드물게 붕괴하는 현상은 매혹이란 새로운 쿼크의 존재를 가상해야만 설명될 수 있다는 이론이 70년대 초 글라쇼 등에 의해 제기됐다. 이휘소 박사는 74년에 쓴 "매혹 입자들의 탐색"이란 논문을 통해 이들 입자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지, 또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를 치밀하게 계산해 예언했다. 매혹 쿼크가 발견되었을 당시, 이휘소 박사의 예언은 정확했다. 이로 인해 이휘소 박사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2년뒤인 76년에는 이 새로운 소립자를 발견한 두 그룹이 대표인 팅과 리히터가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휘소 박사가 좀 더 오래 살아 있었더라면 노벨상을 두번은 타지 않았을까?



이휘소 박사가 연구한 분야는 물리학의 진전을 가져온 연구들이었다. 그런 그가 대량 학살 무기인 핵기술을 한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은 그를 욕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그의 죽음에 관한 것들이다.



이는 그의 사고 순간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여 올려놓은 기사이다.

"... 세계 최대 입자 가속기가 있는 페르미연구소에서 서쪽으로 약 2백 km 떨어진 일리노이주의 80번 고속도로. 길은 한산했지만, 안개가 기고 노면이 젖어 있었다. 시속 88km속도로 달리던 대형 트럭이 갑자기 소리를 냈다. 그러나 운전사는 타이어 펑크를 알아채지 못했다.
차가 오른족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운전사는 바로 잡으려 했고, 트럭은 다시 왼쪽으로 미끄러졌다. 중앙분리대를 넘어버린 트럭은 달려오는 이휘소의 승용차와 충돌했다."


이로 인해 이휘소는 앞쪽 철제 창틀에 머리를 부딛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뒤 좌석에 앉아 있었던 가족들은 모두 경상에 그쳤다고 한다.

여기서 그의 죽음이 미국 정보부의 관여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이휘소 박사는 고국에 대한 뜨거운 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의사에 대해 경계하는 미국의 시선을 종합적으로 본다면 이는 타살의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1977년 7월 5일자 조선 일보에서도 이와 관련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논리는 이휘소 박사의 전공은 소립자 이론이지만 그가 보인 연구 결과를 보면 핵물리학 관리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언급한뒤 이휘소 박사의 자동차 사고가 단순한 사고인지에 대해서 쉽게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와는 의견이 다르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이휘소 박사를 미국이 단순한 핵개발의 위험성의 배재를 위해서 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그가 조국을 위해 힘써야 할 때라고 이야기 한 것은 자신의 연구분야였던 소립자 분야의 연구를 한국에서 선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가 평생을 받쳐 연구했고, 인정받기 시작했던 소립자 연구를 그만두고 핵개발에 매진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핵무기는 학문적인 어려움보다는 기술적 어려움에 있어서 그 개발이 힘겨웠던 분야다. 또한 물리학이 전쟁 무기로 이용되는 것을 학자였던 그가 찬성했을까도 의문이다. 초창기 핵무기 개발은 실험적 요소가 강했다. 하지만 핵무기의 위력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반성이 끊이지 않고 있었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분명 이휘소 박사를 모욕하는 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는 소설에서는 그 이름을 듣게 되었지만, 그는 위대한 물리학자였다. 안타까운 사고로 인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지만 않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이렇게 픽션의 한 장르에 소개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이전에 그에 대한 제대로된 평가부터 이루어져야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