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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nocence

같은 생각,판이한 삶-진화론의 두 아버지, 다윈과 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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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는 부유했으며, 평탄한 삶을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조부는 학자, 부친은 의사로서 사회적 명망을 얻은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가족과 헌신적인 아내의 지원 덕분에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사격과 승마, 음주를 즐기며 친구들과 어울렸고, 학자 집안 출신임을 일찍부터 인정받아 당대의 실력파 학자들과 교분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신중했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줄 알았으며, "무례할 정도로 예의바르다"는 칭찬 겸 비난을 받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한 남자는 평생 입에 풀칠할 걱정을 하며 지냈고, 불안정한 궤도를 그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형과 함께 돈을 벌러 나섰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을 달래기 위해 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독학으로 지식을 쌓았습니다. 열대림을 헤치고 다니며 채집한 동물을 팔아 연명했으나, 그나마 모은 재산도 화재, 투자 실패 등 불운에 불운을 겪으며 날려버립니다. 평생 갖가지 연구에 매달렸으나, 주류 학계에서는 그를 냉대했습니다.

그는 연관성 없는 다양한 주제들에 마음이 팔렸으며, 충동적이고, 엉뚱한 풍운아였습니다.

그리고 극과 극의 배경을 가진 이 두 남자의 머리에 비슷한 시기,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 중 하나가 떠오릅니다.


네. 바로 진화론의 아버지 다윈(Charles Robert Darwin)과  진화생물지리학의 제창자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입니다.

진화론의 토대를 닦은 두 사람의 논문이 동시에 발표된 1858년의 에피소드는 유명합니다. 

당시 영국에서 손꼽히는 자연학자로 인정받고 있던 49세의 다윈은 14살 아래의 이름 없는 탐험가가 멀리 말레이군도에서 보내온 편지를 한 통 받게 됩니다.  '이론의 검토를 부탁한다'는 내용과 함께, <원형에서 무한정 이탈하는 변종의 경향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간결한 논문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월리스는 다윈이 쓴 <비글호 항해기>를 읽고 25세 때인 1848년 무작정 아마존으로 탐험을 떠났고, 그 뒤 동남아시아를 탐사하다 진화의 개념을 생각해냈습니다. 이전에도 서신 왕래가 있었고, 자신의 이론에 공감해줄 것이라 믿어 다윈에게만 논문을 보낸 것이죠.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월리스가 말라리아에 걸려 열에 달뜬 상태에서 사흘 동안 완성한 이 논문을 읽고, 다윈은 망연자실합니다. 논문은 '자연선택'이나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다윈 자신이 20여년간 정리해서 발표만 남겨두고 있던 연구 내용과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윈은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에게 "이렇게까지 서로 일치하는 경우를 이제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설령 월리스가 1842년에 쓴 나의 초안을 보았더라도 이보다 더 훌륭한 초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고 편지에서 쓰고 있습니다.

다윈의 고민을 알게 된 친구들-찰스 라이엘과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은 월리스의 논문과 다윈의 연구를 생물분류학회(런던 린네학회)에서 함께 발표하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무명인 월리스의 업적을 깔아뭉개지 않으면서도 스타급 학자인 다윈의 연구를 주목받게 만드는 방법이었던 것이죠.

과학계의 거물이었던 친구들의 실력 행사 덕분에, 다윈이 월리스의 편지를 받은 지 13일 만인 1858년 7월 1일, 린네학회에서는 두 사람의 논문이 함께 발표됩니다. 당시 월리스는 자신의 논문이 발표되는지도, 자신이 정신적 멘토로 여기고 있는 다윈이 자신의 논문과 흡사하면서도 보다 자세한 증거를 담은 논문을 함께 내놓은지도 모른 채, 말레이 군도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Alfred Russel Wallace (1823. 1.8~1913. 11.7)

두 사람의 논문은 8월 린네학회에서 발간하는 저널에 실렸고 일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만, 그 가치에 걸맞는 반응은 얻지 못했습니다. '진화론'이 세상을 흔들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다윈이 서둘러 <종의 기원>을 출간하면서부터입니다. 

1쇄 1250부가 발간 당일 매진될 정도로 관심을 모은 이 책은 단숨에 영국 사회의 이슈로 부각되었고, 곧 진화론을 지칭하는 '다윈주의(darwinism)'이라는 신조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련의 소식들을 듣고(워낙 오지에 있었던지라 편지가 도착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겁니다) 밀림에서 나비를 채집하고 있던 월리스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출신 계층에서 오는 차별 대우라고 분통을 터뜨렸을까요? 자신의 생각을 훔쳐갔다고 다윈을 저주했을까요?

아닙니다. 월리스는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박물학자인 다윈 씨와 후커 박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저에게 몹시 감사하더군요. 제가 다윈 씨에게 그분이 현재 집필하고 있는 대작과 같은 주제에 관한 논문을 보냈었거든요"라고 썼습니다.

다원이 우편으로 보내온 <종의 기원>을 대여섯번 되풀이해 읽은 월리스는 오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다윈은 세상에 새로운 과학을 선사했어. 고금의 모든 철학자들 위에 그의 이름을 올려야 할 거야. 어떤 찬사도 아깝지 않아!"

Charles Robert Darwin (1809. 2.12~1882. 4.19)

월리스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윈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의 '진화론'에 대한 생각들은 어둠 속에 묻혀버렸으리란 것을. 그리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꼼꼼한 조사와 끈질긴 연구를 다윈이 '맡아서' 해 주었다고 여겼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조건을 갖춘 다윈을 시기질투하기보다, "아, 다행이다. 저런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 주어서"라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월리스가 다윈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로 그가 가난한 하층 계급 출신이었으며, 뛰어난 야외생물학자이면서도 심령술과 강신술, 골상학에 심취하는 기이한 면모, 그리고 나중에는 인간의 뇌가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천연두 백신 접종을 반대하는 등 '괴짜스러운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보잘것 없는 집안 출신이었던 월리스는 돈도 없고, 운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1837년, 그가 열 네살의 나이로 학교를 그만두고 목수, 막노동꾼, 토지측량사, 마을교사로 일했습니다.

토지측량일은 그에게 자연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깨닫게 했는데요, 혼자서 싸구려 문고판 책을 들고 다니며 식물학을 공부하곤 했습니다. 직접 자연과 부닺치며 연구하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친구인 양말공장 견습공 출신의 동물학자 헨리 월터 베이츠와 땡전 한 푼 없이 아마존 답사를 떠났으며, 이어 말레이 군도 탐험을 떠납니다.

주로 밀림에서 채집한 동식물을 박물관이나 수집가에게 팔아가며 생계를 유지했는데요, 일이 제법 돈이 된다 싶더니만, 1852년 폭풍을 만나 그동안 모은 돈과 채집한 곤충과 동물 수천점을 모두 잃고 맙니다. 1862년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12만여 마리의 동물과 곤충 채집표본을 팔아 번 돈을 광산과 철도 투자 실패로 날려버리지요. 이래저래 돈과는 참 인연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월리스는 수많은 동물들을 채집하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개념을 정립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담은 초기 논문들을 박물학 전문지에 보냈으나, 돌아온 것은 학계의 빈정거림 뿐이었다.

학문적으로도 그는 여러가지 악수를 둡니다. 심령학에 빠져 강령회를 열기도 하고, 골상학 논문에 매달리는가 하면,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인지를 밝히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한편으론 초기 사회주의자로서 여성의 참정권과 토지개혁 운동을 지지하기도 했지요. 그를 다윈의 제자로 여겼던 과학자들은 진화론 연구를 져버린 월리스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아마도, 지나치게 넘쳐나는 열정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월리스에 대한 자료들을 읽을수록 '순박하게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의 이목이나 평판, 명예 따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관심이 흐르는 쪽으로 무작정 돌진하는 스타일이죠.

반면, 다윈은 <인간의 유래>,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 대하여> 등 진화론을 심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계속 출간하며 학문적 입지를 다져갑니다. 월리스와 대조적으로, 그는 인생에서 하나의 주제를 잡고 거기에 평생 매달린 사람이었지요. 두 사람은 동시에 '진화론'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지만, 이를 끝까지 짊어지고 나간 사람은 다윈입니다.

다윈은 영국 링컨셔의 이름난 학자 집안 출신입니다. 다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은 유명한 외과 의사이자 식물학자였으며, 그의 막내 아들이자 다윈의 아버지 로버트는 의사로서 명망이 높았습니다. 로버트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다윈은 의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목사라도 만들어보자 싶어 케임브리지대에 보내지만, 다윈은 식물학교수인 존 스티븐스 헨즐로와 어울리며 박물학에 흥미를 갖게 됩니다.

비글호를 타기 전까지, 다윈은 '철없는 부잣집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1831년 12월 27일, 22세의 다윈은 비글호에 오릅니다. 당시 이 귀한 집 도련님은 배 멀미와 거친 선상에서의 생활에 무척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여행은 다윈의 인생을 바꿔놓지요. 1836년 5년만에 영국으로 돌아온 다윈은 1839년 <비글호 항해기(The Voyage of the Beagle)>를 내며 본격적인 자연학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젊은 날의 다윈. 비글호 남험에서 돌아온 다윈은 계속해서 풍토병 후유증에 시달렸다. 몸이 약해진 것 때문에 오직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1839년에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인 엠머 웨지우드와 결혼합니다. 자신과 아내의 집안이 모두 부유했기에, 다윈은 돈 걱정없이 순수 학자로서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지요. 또, 5개 국어에 능통한 재원이었던 아내는 물심양면으로 남편의 연구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녀의 번역 지원이 없었으면 다윈이 그렇게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다윈을 위대한 학자로 만든 가장 중대한 요소는 바로 그의 성격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월리스에겐 없고, 다윈에겐 있는 것- 그건 돈이나 배경보다는 '집중과 끈기'였다고 생각됩니다.

다윈은 일찌기 자신의 관심사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끈기있고 꼼꼼하게 파고들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이건 아주 드문 재능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월리스처럼 극단적인 방향으로는 아니더라도)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 들어봤다가 팽개치기를 반복하기 마련이니까요.

10살이 되기 전부터 곤충과 동물에 관심을 가졌으며, "사냥과 개, 쥐 잡기 외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너는 결국 네 자신과 가족 모두에게 수치가 되고 말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책망에도 평생의 학문으로 선택한 자연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37세때부터 8년간 바다 갑각류인 따개비를 연구한 바 있는데요, 무려 1만여 가지의 서로 다른 변이를 차근차근 기록하고 분석한 자료가 남아있습니다. <종의 기원>의 경우에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1859~1872년 사이 무려 다섯 차례나 개정판을 냈다는군요. 명성을 얻고난 뒤, 쇠약해진 몸으로도 2~3년에 한 번 꼴로 새 책을 내놓는 은근함은 감탄스럽습니다.

옥스퍼드대 자연사 박물관에 세워진 다윈의 동상

월리스 역시 이런 다윈의 '선택과 집중의 능력'을 존경하고 인정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월리스는 다윈을 일평생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다윈 역시 끝까지 월리스를 챙겼습니다.

1860년 다윈은 월리스에게 쓴 편지에서 "시간이 많았더라면 당신은 아마 나보다 훨씬 훌륭한 논문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진심어린 위로를 합니다. 1862년 월리스가 말레이 군도에서 돌아오자, 다윈은 즉시 그를 집으로 초대해 환영했지요.

월리스가 재산을 탕진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에는 다윈이 정부에 로비를 해서 특별연금을 받을 수 있게 주선하기도 했고요. 이런 다윈의 배려에, 월리스는 훗날까지 "나는 다윈 선생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느낀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참 묘하고도 얄궂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윈파의 '술수'가 아니었다면 '다윈주의'가 아닌 '월리스주의'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을 거라고도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랬더라면 진화론이 지금과 같은 굳건한 학문으로 자리잡기 힘들었으리라 지적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평가나 상상과는 별도로, 다윈과 월리스는 서로 무척 다르면서 그 다른 점 때문에 서로를 위할 수 있었던 관계였던 듯 합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너,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너에게 경계나 반감보다는 감탄과 친밀감을 느꼈던 두 남자. 참 흥미로운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