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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뇌' 장내 미생물로 초기 치매 병세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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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속에 서식하는 미생물의 차이점을 통해 초기 치매를 진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됐다. 초기 단계의 치매 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과는 다른 종류의 '장내 미생물(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을 구성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학계에 보고된 것. 장내 미생물 분석만으로도 극히 초기 단계 상태인 치매 환자의 진단 확률을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생태계 불균형 통해 초기 치매 유무 밝혀

우리 몸속 미생물의 대부분은 장내 미생물이 차지한다. 보통 4000종에서 1만종쯤 존재한다. 장내 미생물의 수는 세포 수보다 2배 이상 많고 유전자 수는 약 100배 많다. 미생물을 빼놓고 인간의 유전자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 장내 미생물을 '제2의 게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장내 미생물은 인간의 면역계, 대사, 정신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숨은 조력자다. 몸속 세포와 밀접하게 연결돼 긴밀하게 신호와 자극을 주고받으며 세포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 외부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장내 미생물과 뇌 질환 사이의 강력한 연결고리는 최근의 연구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장내 미생물 군집 형태에 따라 변하는 면역작용과 대사산물이 자폐증, 알츠하이머, 우울증, 뇌전증 등 뇌 관련 질환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장내 미생물이 뇌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장-뇌 축(Gur-Brain axis) 이론이 2000년 초기부터 조명되어 왔고, 알츠하이머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장내 미생물 구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 또한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증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초기 치매 환자의 장내 미생물을 분석한 연구는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의 주인공은 미국 워싱턴대 의대 병리학·면역학과 가우탐 단타스(Gautam Dantas) 교수팀이다. 이들은 치매 초기 단계에 있는 환자를 정확해 구별해낼 방법을 찾기 위해 장내 미생물에 초점을 맞췄다.

보통 '치매'라고 하는 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전체 치매 환자의 약 70%를 차지한다. 또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끔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뒤 사물을 잘못 알아보거나 기억을 잃어가는 '외상성 치매'를 볼 수 있는데, 외상성 치매로 진단받은 환자의 60%가 알츠하이머 치매와 같은 증상을 보이며 만성적 퇴행성 뇌질환을 갖게 된다.

치매 원인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단서만 그림자처럼 알려져 있다. 특히 그동안 과학자들이 지목한 알츠하이머 치매 주범의 하나는 뇌의 특정 노폐물 단백질인 '베타아밀로이드'다. 아밀로이드는 당과 단백질이 엉겨 뭉쳐진 덩어리다. 또 신경세포 안에 있는 타우 단백질이 잘못 접혀 응집해 발생한다. 타우 단백질은 베타아밀로이드와 함께 치매 환자의 뇌에서 많이 발견되는 물질이다.

물론 베타아밀로이드는 정상인의 경우에도 인체 곳곳에서 소량 만들어진다. 이후 빠르게 분해돼 인체 내에 쌓이지 않는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 조직을 살펴보면 베타아밀로이드가 분해되지 않고 쌓여 엉긴 덩어리(플라크) 형태다. 나이가 들면서 베타아밀로이드가 비정상적으로 과다하게 생성돼 뇌세포 주변에 쌓이면서 뇌의 주요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 따라서 베타아밀로이드는 알츠하이머 치매를 진단할 때 주요한 척도, 즉 바이오마커로 사용된다.

단타스 교수팀은 연구를 위해 먼저 164명의 실험 참가자를 대상으로 치매 초기 단계에 접어든 사람들을 찾아냈다. MRI(자기공명영상)와 PET(양전자 단층촬영)의 뇌 스캔 자료와 뇌척추액 분석 결과를 통해 치매 초기 징후를 보이는 49명의 환자를 가려냈다. 49명 환자의 경우 치매의 원인으로 알려진 베타아밀로이드와 타우 단백질이 뇌척수액 속에서 발견됐지만 인지기능은 모두 정상이었다.

연구팀은 구별된 49명의 치매 초기 환자들과 다른 참가자들의 장내 미생물을 분석했다. 참여자들에게는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동일한 식단의 음식을 제공했다. 그 결과 두 그룹의 장내 미생물의 종류와 그 미생물이 수행하는 생물학적 작용이 현저히 다르게 나타났다. 장내 미생물의 구성이 크게 달랐던 것이다.

 

 

대변 샘플 제공만으로 진단 가능

연구팀은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두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나는 인지기능 저하가 나타나기 전에 뇌세포의 비정상 단백질인 베타아밀로이드나 타우가 증가하는 것과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치매 초기 환자의 뇌 구조 변화가 장 속 환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 하나는 장내 미생물의 환경 변화가 뇌 구조 변화를 일으켜 치매를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역으로 장내 미생물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단타스 교수는 장내 미생물이 뇌에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뇌가 장내 미생물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두 경우 모두에서 이러한 상호작용이 발견된다면 치매 치료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중개 의학'에 발표되었다.

이번 연구는 단순하면서 효율적인 치매 검사를 가능케 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는 치매를 진단하려면 베타아밀로이드 플라크를 요추천자라는 바늘로 채취한 뇌척수액 검사나, MRI PET라는 고가의 뇌영상 검사를 거쳐야 했다. 이마저도 어느 정도 증상이 나타난 뒤에 이뤄져 조기 진단이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연구팀의 연구는 대변 샘플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초기 치매 진단이 가능하다.

연구팀의 기술이 실용화돼 장내 미생물을 통한 빠른 초기 치매 진단이 가능해지면 초기 치매 환자의 장내 환경 개선을 통한 효율적인 치료가 가능해질 것이다. 장내 미생물의 변화와 치매 초기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면 유익균을 늘리고 유해균을 제거해 치매 증상 출현을 지연시키거나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단타스 교수는 장내 미생물 생태계 불균형이 치매 초기 발병의 원인이라면 그것은 장내 염증 때문일 것으로 추측했다. 일부 장 박테리아가 만드는 대사산물은 장 자체에 염증을 일으키지만 혈류를 타고 돌면서 온몸의 면역체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앞으로 더 많은 분석을 거쳐 완벽한 초기 치매 진단 방법을 찾을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복잡한 검사를 하지 않아도 돼 의료비용이 절감될 뿐 아니라 노년기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